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문단 편집) == 연혁 == 1881년에 미국 금융업계의 큰손이었던 헨리 리 히긴슨(Henry Lee Higginson)이 창단했다. 히긴슨은 보스턴 심포니의 창단 및 운영 이외에도 하버드 대학교의 후원자로서 보스턴 지역 사회의 문화와 학문 발전에 공헌했던 인물이다. 히긴슨은 1918년 은퇴할 때까지 거의 40년 가까이 보스턴 심포니를 운영하며 악단의 초기 40년 동안 악단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독일 음악 전통을 숭상하여 악단에 독일 음악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히긴슨의 방침에 따라 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부터 히긴슨이 은퇴하던 1918년까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는 모두 독일-오스트리아 출신이 영입되었다. 초대 음악감독으로 [[독일]] 출신의 바리톤 가수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였던 게오르크 헨셸[* 헨셸은 나중에 영국으로 귀화하여 Sir George Henschel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는 만년의 일이며, 그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시절에는 독일 국적이었으며, 그가 보스턴 심포니에서 사용했던 이름도 George가 아니라 Georg였다.]을 초빙했으며, 이후에도 모두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이 재임했다. 히긴슨은 두번째 상임지휘자로 빈에서 활동하던 빌헬름 게리케를 영입했다. 게리케는 5년간 보스턴 심포니를 원만하게 이끌었으나 네임드 지휘자를 영입하려는 포부를 가진 히긴슨은 게리케와 재계약하지 않고, 당시 독일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젊은 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슈]]를 보스턴으로 영입했다. 니키쉬는 나중에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이 되었지만 히긴슨이 그를 영입했을 때는 34세의 젊은 지휘자였다. 니키쉬는 보스턴에서 4년간 재직했으나, 독일에서 워낙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1893년 직을 사임하고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 후인 189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에 동시에 올랐다. 히긴슨은 니키쉬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밀 파우어를 영입했다. 파우어 역시 준수한 지휘자였으며 보스턴에서 5시즌 동안 재직하다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영입되면서 악단을 떠나게 되었다. 파우어가 뉴욕 필에 영입되자 히긴슨은 일단 예전에 악단을 원만하게 이끌었던 게리케를 다시 초빙했다. 게리케는 계약을 연장하며 8년간 악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게리케의 세번째 계약이 끝나갈 당시 히긴슨은 악단에 세계 정상급 지휘자를 초빙하기로 결심했다. 게리케와는 계약 종료로 원만하게 관계를 끝냈다. 히긴슨이 당시 바그네리안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 당시 히긴슨은 당시 브람스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구스타프 말러파(말러, 멩겔베르크, 발터)에게는 전혀 제의를 하지 않았고 바그너파의 1,2,3인자에게 차례로 제의를 했다. 히긴슨은 당시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인 [[구스타프 말러]],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빌렘 멩겔베르크]], 당시 빈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던 [[브루노 발터]] 등도 상임지휘자 후보로 고려했으나 결국 이들에게 제의를 하지는 않았다. 히긴슨이 최종적으로 결정한 인물은 바그너의 수제자이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장기 재직하여 빈 음악계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던 거장 [[한스 리히터]]였다. 하지만 한스 리히터는 1904년 이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계약을 맺었는데, 노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히터는 대서양을 오가며 두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보스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다음으로 리히터의 후배이자 당시 바그너파 2인자[* 1인자는 당연히 바그너의 수제자인 한스 리히터였다. 다만 리히터는 브람스와도 원만한 관계를 이어갔다.]였던 독일의 거장 지휘자 [[펠릭스 모틀]]에게 제의했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그리고 나서 히긴슨은 당시 바그너파의 3인자였던 칼 무크[* 한스 리히터 등과 함께 바그너파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성지 바이로이트의 상징적과도 같은 지휘자였다. 브람스파인 한슬릭 등의 결사적인 반대로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오르는데 실패했고 그 자리는 브람스와 한슬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구스타프 말러]]에게 돌아갔다.](1906-08; 1912-18)에게 제의했고, 무크는 보스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무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로서 독일에서 베를린 왕립 가극장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이끄는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히긴슨은 [[독일 제국]] 정부와의 교섭 끝에 간신히 그를 영입할 수 있었다. 무크는 의외로 보스턴에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한 명이었고 베를린 왕립오페라를 지휘하면서 황제 빌헬름 2세와도 주기적으로 알현하는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무크는 대중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보스턴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1911년에는 당시 독일 최고의 가극장 중 하나였던 뮌헨 왕립 가극장에서 제의가 왔지만 그는 보스턴을 선택하고 뮌헨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브루노 발터]]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크는 대서양을 오가며 베를린과 바이로이트, 그리고 보스턴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연합국으로 참전했고, 결국 무크는 1918년 적성국인으로 체포되며 강제로 활동 중지를 당했다. 이 사건 이후 히긴슨은 은퇴하여 곧 사망했다. 칼 무크의 체포 및 히긴슨의 은퇴 이후 새로운 악단 경영진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 이후 한동안 프랑스 출신의 지휘자들은 연이어 선임하여 보스턴 심포니는 독일 음악 전문의 이미지를 지우고 프랑스 음악 전문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다. 1918년 무크의 체포 이후 같은 연합국 출신 지휘자인 [[프랑스]]의 앙리 라보를 데려왔지만, 라보는 불과 한 시즌만 지휘하고 돌아갔다. 라보의 후임도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던 [[피에르 몽퇴]]였는데, 몽퇴는 당시 독일계 음악 일색이었던 미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프랑스 음악을 중시하고 부드러운 색채의 소리를 악단에서 뽑아내 화제가 되었다. 몽퇴가 1924년에 [[유럽]]으로 돌아간 뒤 [[러시아]] 출신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들어왔는데, 쿠세비츠키는 악단을 미친듯이 갈궈대는 기질 때문에 단원들과 트러블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대 최장 재임 기간인 25년 동안 악단의 방송 출연이나 보스턴 근교의 탱글우드에서 여름마다 개최하는 탱글우드 음악제의 상주 관현악단 자격을 얻는 등, 악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리즈시절]]을 맞게 되었다. 쿠세비츠키는 악단을 엄격하게 조련하면서 기본 레퍼토리의 연주력을 갈고 닦았고, 거기에 사재를 털어 네임드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해 초연하기도 했다. [[버르토크 벨러|버르토크]]의 최만년 작품인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이 이렇게 작곡되어 초연된 곡 중에 가장 유명하며, 지금도 보스턴 교향악단의 기본 연주곡으로 올라와 있다. 1949년에 쿠세비츠키가 사임한 뒤 [[샤를 뮌슈]]가 뒤를 이었는데, 전임자와 달리 비교적 유들유들한 품성이라 단원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프랑스의 독일어권 지역인 [[알자스-로렌]] 출신[* 그의 이름에 표기된 움라우트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Karl이었다.]인 뮌슈는 독일과 프랑스 음악에 모두 능했다. 뮌쉬는 젊은 시절 독일에서 음악을 배웠고, 지휘자가 되기 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단원이었는데, 이 시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는 본좌 [[푸르트벵글러]]와 [[브루노 발터]]였다. 프랑스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뮌쉬는 보스턴에 입성한 후 전속사였던 RCA에 많은 녹음을 남기고 해외 공연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악단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다. 뮌슈는 프랑스 출신 지휘자 중 가장 네임드라 할 수 있는데, 때문에 프랑스 음악 녹음 가운데 명연주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베이스라 할 수 있는 베토벤, 브람스 등 독일 정통 레퍼토리에서도 좋은 해석을 들려 주었다. 특히 엄청난 열정으로 가득찬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음반은 최근 국내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뮌슈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취임하여 69년까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방대한 레퍼토리로 유명한 라인스도르프는 재임기간 동안 명성에 맞게 엄청난 양의 레퍼토리를 다루었는데 같은 레퍼토리를 다시 올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조차 보스턴 재임 기간에 단 두 번 연주했다고 한다.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말러와 브루크너를 레퍼토리에 올린 것은 그의 공적이다. 또 오페라 지휘도 활발히 했던 라인스도르프는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인 보스턴 심포니가 이전에는 다룰 기회가 없었던 바그너, 푸치니, 베르디 등의 오페라도 다양하게 연주했고 음반도 남겼다. 다만 그는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탈모|핸디캡이 있는 외모]]와 쇼맨쉽이 없고 단조로운 지휘 동작 등으로 대중들에게는 실력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한번 올린 레퍼토리를 다시 올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갈수록 레퍼토리가 마이너한 곡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 청중, 비평가, 단원들 모두에게 좋지 못한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토스카니니의 제자답게 한 성격해서 막판에 단원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라인스도프 시절 보스턴 심포니는 전임자 뮌슈 시절에 정확하지만 지나치게 날카롭고 강한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여전히 정확성을 유지하면서도 유려하고 로맨틱한 사운드를 지닌 오케스트라로 변모하였으며 튜닝과 밸런스 측면에서도 한단계 더욱 발전했다. 특히 재임 마지막해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매우 훌륭한 연주로 라인스도르프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얼마나 훌륭하게 조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연주는 오랫동안 미국에서만 유명했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재평가되면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보스턴 심포니로서도 역대급 명연 중 하나인데, 보스턴의 장기인 정확함, 날카로움, 명료함, 밸런스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는 수연이며 뮌슈 시대보다 보편적 명문 악단으로서 더욱 발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라인스도르프가 물러난 이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윌리엄 스타인버그]]가 그 뒤를 이었다. 보스턴 심포니에 취임하기 전 스타인버그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도 여러 차례 공연하면서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보스턴 심포니에 취임한 이후 건강이 크게 나빠져 3시즌만에 사임했다. 1971년에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유럽 순회 공연을 이끌었다. 짧은 시간 재임하다가 은퇴했지만 홀스트 행성 등의 좋은 녹음을 남기기도 했으며, 보스턴 특유의 정확한 앙상블을 살리면서도 예전의 날카로웠던 느낌을 조금 순화시키며 조화로운 느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해석 경향으로 인해 전임자들에 비해 특색이나 카리스마가 조금 부족하다는 인식을 주기도 했으며, 또한 전임지와 마찬가지로 [[탈모|핸디캡이 있는 외모]]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다. 결정적으로 짧은 재임 기간으로 많은 음반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유튜브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베토벤 영상 실황 등이 공개되면서 스타인버그 역시 재평가받고 있다. 1973년에는 창단 이래 최초의 동양인 지휘자인 [[일본]] 출신의 [[오자와 세이지]]가 제15대 음악 감독에 부임했다. 1972년에 음악고문으로 부임했던 오자와는 2002년 사임할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악단을 이끌어 쿠세비츠키가 세운 역대 최장기 재임 기록을 갈아치웠고, [[도이체 그라모폰]]과 [[필립스]], [[EMI]], 텔락 등에서 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오자와는 취임 초기에 프랑스 음악, 차이코프스키, 말러 교향곡 등의 녹음으로 호평을 받았고,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뛰어난 해석을 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후기낭만주의 음악에서 상당한 강점을 보였는데 독일-오스트리아, 국민주의, 프랑스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두루 능한 해석을 보였다. 80년대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라는 대장정을 하기도 했다. 오자와는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두루 뛰어난 해석을 보였지만 오자와 본인 스스로는 카라얀의 제자로서 정통으로 독일 음악을 배운 지휘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자와는 전임자들인 뮌슈, 라인스도르프, 스타인버그가 모두 독일-오스트리아계 출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임자들이 자신 만큼 철저하게 독일 음악의 전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자와는 재임기간 내내 베를린 필하모닉 등 독일 오케스트라 현사운드의 핵심인 인바운드 연주법을 보스턴 심포니에 이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악단에 독일적 전통을 이식하기 위해 [[클라우스 텐슈테트]], [[쿠르트 마주어]] 등 독일 출신 객원 지휘자들을 초빙하는데 무척 공을 들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80~90년대 오자와는 [[베를린 필]]의 차기지휘자 후보로 거론될 만큼 승승장구했지만 90년대 중반부터는 젊은 시절의 번뜩이던 생동감이 다소 떨어지며 매너리즘에 빠져 정체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이후 보스턴 심포니와의 음반이 70년대보다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은데 비해 오히려 같은 시기 오자와가 빈 필이나 베를린 필과 녹음한 음반들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일부는 오늘날에도 레퍼런스로 꼽히기도 한다. 오자와의 만년 발언에 따르면 보스턴 심포니와의 초기에는 자신도 젊었기에 리버럴했던 측면이 있었지만 90년대 들어서는 본인이 장기 집권함에 따라 악단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악단을 다소 타이트하게 대했다고 말했다. 그 동안 별 탈 없이 흘러갔던 오자와와 악단 사이의 관계는 1996년 이후 탱글우드 음악제의 개편을 둘러싸고 심한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며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말에는 언론까지 합세해 오자와를 [[디스]]했다. 2002년에 빈 국립 오페라의 예술 감독에 취임하게 되면서 보스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직에서 물러났다. 물러난 후, 장기간 악단에 재직하며 악단에 공헌한 공로로 계관 지휘자에 추대되었다. 오자와 사임 후에는 약 두 시즌 가량 음악 감독 공석인 상태로 활동했고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오자와와 러바인 사이의 2003-2004 시즌에 수석객원지휘자 직책으로 사실상의 상임지휘를 맡았었다. 물론 여러 지휘자들이 돌아가면서 연주를 하긴 했지만], 2004/05년 시즌부터 창단 이래 최초로 미국 본토 출신 지휘자인 [[제임스 러바인]]이 음악 감독에 부임했다. 러바인은 이전보다 현대음악 작품의 연주에도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역시 낭만주의 정통 레퍼토리에서 두루 능한 장점을 보이며 악단을 잘 이끌었다. 레바인의 재임기에는 음반 시장이 사실상 무너진 상태라 음반 녹음을 거의 접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전임자들 못지 않게 훌륭한 연주들을 보였다. 레바인 개인적으로는 90년대에 메트 오케스트라와 남긴 녹음들보다 보스턴 시절 연주 퀄리티가 더 뛰어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움을 준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자체의 기량이 뛰어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지만 레바인 본인의 지휘 역량 또한 90년대 메트 오케스트라나 뮌헨 필 시절보다 한층 원숙해졌다. 또 악단에서도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좀 더 대중 친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러바인의 재임 기간은 2011/12년 시즌까지로 잡혀 있었으나, [[파킨슨병]]과 [[추간판 탈출증]], [[좌골신경통]] 등의 지병 악화로 2011년 봄 상임지휘자에서 조기 퇴임하게 되자 2011-12년 시즌은 ~~벌떼마무리~~ 객원 지휘자들을 대거 초빙해 공백을 메꿨다. 2013년 5월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를 새 음악 감독으로 내정했고, 2014년부터 임기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재임 중에 있다. 중간에 계약을 한차례 연기해서 2022년까지 계약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